가족 떠난 빈자리, 버리지 못한 추억… 산더미 쓰레기가 채웠다
2021-10-21
[쓰레기집에 사는 사람들] <3>노인가구의 외로움 채운 쓰레기
감성적인 카페와 이색적인 맛집들이 모여 ‘핫플레이스’로 떠오른 서울 용산구 해방촌. 화려한
골목 안쪽에 바퀴벌레가 우글거리는 김칠수(97·이하 가명) 노인의 반지하 집이 있다.
한국전쟁 참전용사인 김 노인은 시청각 장애가 있는 둘째 아들과 햇볕도 들지 않는 방에서
신문 한 부를 벗 삼아 지낸다. 거동이 불편한 부자는 낡아서 더는 쓸 수 없는 물건들을 추억인 양 끌어안고 산다.
●쓰레기를 추억인 양 끌어안고 살다
김 노인은 한국전쟁 당시 설악산 부근에서 인민군에 맞서 싸웠다. 한때 일본 유학을 준비했던
김 노인은 공부를 포기하고 가족과 나라를 지키러 나섰지만, 지뢰를 밟아 왼쪽 다리를
잃었다. 전쟁이 끝난 후 해방촌에 터를 잡았다. 옷감을 재단하고 옷에 단추를 달아
동대문에서 장사하는 큰형 가게에 납품하며 생계를 유지했다. 1970~1980년대까지는 장사가
꽤 잘돼 살림이 여유로웠다. 그러나 두 아들이 차례로 쓰러지면서 가세가 기울었다. 큰아들은
1995년 추락 사고로 척추를 다치고 나서 시름시름 앓다가 5년 만에 세상을 떠났고,
뇌수막염에 걸린 둘째 아들 수남(57)씨는 간신히 목숨은 건졌지만 시력과 청력이 크게 나빠져
중증 장애를 얻었다. 병원비를 마련하기 위해 살던 집도 팔았다. 40년간 해 온 장사도 접었다.
그게 벌써 20여년 전이다.
유난히 금실이 좋았던 김 노인은 약 10년 전 아내와 사별한 후 집안 정리를 아예 놔 버렸다.
수남씨는 “어머니가 살아 계실 때는 아버지도 청소를 열심히 하셨다”고 기억했다. 사랑했던
아내와 큰아들의 빈자리에 옛 물건들이 차곡차곡 쌓였다. 옷감을 다룰 때 썼던 공구, 이제는
입을 일 없는 옷, 먼지가 뽀얗게 앉은 책 등 과거의 흔적들이 이제 막 생겨난 생활쓰레기들과
뒤엉켜 집 안을 채웠다.
●민관협력단 꾸려 대청소… 1t 트럭 3대 오가
보다 못한 주민센터는 민관협력단을 꾸려 김 노인의 집을
치워 주기로 했다. 서울신문 기자들은 지난 11일 용산2가동
주민센터·지역사회보장협의체·더불어건축협동조합,
자원봉사자 등 17명과 함께 김 노인의 주거환경 개선에
동행했다.
오전 8시 30분쯤 바퀴벌레 연막탄을 터뜨리는 것으로 청소가 시작됐다.
이 집의 가장 큰 문제는 바퀴벌레였다. 방구석에 있는 상자를 건드리자 성인
엄지손가락 크기의 바퀴벌레가 툭 하고 떨어졌다. 신발이 들어 있는 상자를 열자 30마리가
넘는 바퀴벌레가 우르르 튀어나와 봉사자들을 질겁하게 했다.
33.1㎡(약 10평) 남짓한 반지하 집에서 오래된 쌀 7포대, 유통기한이 5년을 훌쩍 넘은 김,
더러운 밥솥과 냄비, 바퀴벌레 배설물로 뒤덮인 서랍 등이 쏟아져 나왔다. 김 노인의 아내가
살아생전 썼던 재봉틀도 밖으로 꺼냈다. 총 1t 트럭 세 대가 오가며 폐기물을 날랐다.
물건을 버리려면 집주인의 동의가 필요했다. 주민센터 직원들은 수남씨에게 일일이 “이거
버려도 되냐?”고 확인받았다. 청소에는 6시간이 걸렸다. 김 노인의 이웃들도 청소를 반겼다.
맞은편 집 아주머니는 “집 청소해 주니 내가 너무 고맙다”며 반색했다.
좁은 쓰레기집 안에서만 생활하던 김 노인은 대청소 덕분에 오랜만에 나들이에 나섰다.
청소가 진행되는 동안 구립용산장애인복지관 복지사들은 김 노인과 함께 용산가족공원을
방문했다. 김 노인은 연못 속의 물고기를 보며 유난히 기뻐했다. 손가락으로 물고기를
가리키며 “어이구, 어이구”라고 탄성을 내뱉었다. 2시간 정도 산책한 김 노인은 태극기와
무궁화 앞에서 멈췄다. 국가유공자인 그는 잠시 군인 시절을 회상하는 듯했다. 복지사가
“무슨 꽃인지 아시냐”고 묻자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 기념사진을 몇 장 찍은 김 노인은
깨끗해진 자신의 집으로 발길을 돌렸다.
●“버리기 아까운데…” 한바탕 실랑이
지난 7월 15일 서울 송파구에 있는 정미자(73) 노인의 집 앞에서도 한바탕 실랑이가
벌어졌다. 이날 구립풍납종합사회복지관은 한국정리수납협동조합과 함께 저장강박 증상을
보이는 정 노인의 집을 치웠다.
마지못해 청소에 동의한 정 노인은 청소 내내 돋보기안경까지 쓰고 살펴보며 전전긍긍했다.
“어르신, 이 옷 버려요?”, “버리지 마. 이 옷은 새건데….”, “어르신, 이 시계는 쓰세요?” “시계 안
쓰는데, 그래도 버리면 안 되지.” 직원들과 정 노인은 승강이를 벌였다. 복지관 황은혜 팀장은
“어르신을 설득하는 데만 1년 6개월이 걸렸다”면서 “물건이 쌓여 있는 수준이 어르신 스스로
감당할 수 있는 범위를 넘어섰다고 판단돼 더는 미룰 수 없었다”고 전했다.
약 20년 전 남편과 사별한 정 노인은 생계를 위해 폐품 수집을 시작했다. 현재는 아들 박주형
(42)씨와 단둘이 산다. 남들이 버린 물건을 모아 생계를 꾸린 정 노인은 다른 사람 눈에는
쓸모없는 쓰레기에도 집착을 보였다. 특히 서랍이 비어 있는 모습을 견디기 어려워했다. 조합
관계자는 “청소 일주일 전 미리 짐을 빼놓았는데, 이날 본격적으로 청소하려 정 노인의 집을
찾으니 짐이 그대로 다시 서랍과 옷장에 들어가 있었다”고 귀띔했다.
24.8㎡(약 7.5평) 남짓한 정 노인의 집에서는 유통기한이 지난 치약 42개, 낡은 대야 14개, 4년
전 받은 새 수건, 5년도 넘게 꺼내지 않았다는 누렇게 바랜 도자기들, 장신구, 건전지, 실과
바늘 등이 쏟아졌다. 옷의 무게만 약 181㎏이었다. 쓸 만한 물건을 골라 고물상으로 보내고도
집 밖에는 50ℓ 종량제 봉투 7개와 100ℓ 봉투 1개 분량의 쓰레기가 남았다. 정 노인은 정리가
마무리되자 시원섭섭해했다. 그는 “짐을 빼니 아쉽지만 괜찮다”며 “새집으로 바뀐 것 같아
고맙다”고 말했다.
글 사진 손지민 기자 sjm@seoul.co.kr
황인주 기자 inkpad@seoul.co.kr
(출처 : 가족 떠난 빈자리, 버리지 못한 추억… 산더미 쓰레기가 채웠다 | 서울신문 (seoul.co.kr))
- 다음글
- “아이 밝아지고 성적 올라”… 쓰레기 치우니 일상이 시작됐다
2021-10-21